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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종각과 범종, 고요한 소리에 담긴 깨달음의 철학

by temple1 2025.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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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동종

 

한국 사찰의 종각은 단순한 종소리의 울림을 넘어서 불교 사상과 전통 건축의 미학, 그리고 수행 철학이 깃든 상징적 공간이다. 그 안에 걸린 범종은 중생의 고통을 씻고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도구로, 천년의 역사 속에서 수행자와 민중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왔다. 본 글에서는 종각의 구조와 범종의 상징, 그 소리에 담긴 불교적 세계관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사찰의 종소리는 단지 소리가 아니다

도심 속의 종소리는 보통 시간을 알리는 도구로 인식되지만, 사찰의 범종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다. 그것은 단지 금속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아니라, 불교 사상의 정수가 담긴 '소리로서의 가르침'이다. 한국의 사찰에 가면 경내의 한 편에 종각이라는 독립된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종각은 범종을 중심으로 법고, 목어, 운 판 등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네 가지 법구(法具)를 함께 배치한 구조로, 이 네 가지 도구는 각각 지옥, 축생, 인간, 천상의 중생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중에서도 범종은 중생의 번뇌를 씻어내고 고통을 덜어주는 ‘깨달음의 소리’로 여겨진다. 그 소리는 단순한 청각적 경험을 넘어서 마음속에 울림을 남기며, 정서적 평안과 정신적 집중을 유도한다. 특히 새벽 예불을 알리는 종소리는 사찰의 하루를 여는 신호일뿐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 자비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적으로도 범종은 신앙의 상징이자 불교 미술의 정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은 그 조형미와 소리의 깊이에서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후에도 각 시대마다 수많은 범종이 제작되어 사찰에 봉안되었다. 이들 범종은 단순한 종을 넘어서 당시의 과학 기술, 금속 공예, 예술 감각, 종교 철학이 응집된 문화적 결정체였다. 범종의 음향학적 설계는 단순히 울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주파수를 통해 공간 전체에 음이 고르게 퍼지도록 고려되었고,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중생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사찰의 종각과 범종은 이처럼 보이는 건축과 들리는 소리를 통해 불교의 교리와 수행의 길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구현한 종합 예술 공간이다.

 

종각의 구조와 범종의 상징성

사찰의 종각은 보통 전각 구조로 건립되며, 대부분 목조건축 양식을 따른다. 건물은 사찰 경내의 중심에서 다소 떨어진 독립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종소리가 사방으로 고르게 퍼지도록 고려한 배치다. 종각의 기둥과 지붕은 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며, 지붕 아래에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범종을 포함한 사물들이 봉안된다. 그중 중심에 매달린 범종은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에서 수 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금속 재질은 대부분 청동이다. 범종의 외형은 입구가 넓고 끝이 둥글게 말린 종형으로, 표면에는 비천상, 연꽃무늬, 명문(銘文) 등이 새겨져 있으며,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불교적 상징 체계를 반영한다. 예컨대 종의 몸체에 새겨진 용두(龍頭)는 우주의 중심에서 가르침을 전파하는 상징이며, 연화문은 번뇌 속에서 피어나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범종은 주로 새벽과 저녁에 타종되며, 이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동시에 중생에게 법음을 전달하는 의례적 기능을 한다. 타종 방식도 정해진 순서와 규칙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28번 혹은 33번 타종하는데 이는 불교의 삼십삼천(三十三天)과 중생의 28처(處)를 상징한다. 종각은 이러한 범종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 소리를 극대화하는 음향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내부의 개방 구조와 천장의 곡선 설계는 종소리가 경내를 넘어 산자락 전체로 퍼지도록 도와준다. 또한 법고는 동물 세계를 교화하고, 목어는 수중 생명체, 운 판은 하늘의 중생을 교화한다고 전해지며, 범종과 함께 사대중생을 일깨우는 의례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렇듯 종각과 범종은 단순한 종소리의 장치가 아니라, 불교 우주론과 윤회사상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성스러운 도구이자, 사찰 건축에서 가장 상징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고요함을 깨우는 소리, 범종이 주는 현대적 울림

현대 사회에서 사찰의 종소리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과거에는 신앙과 수행의 일부로만 여겨졌던 범종의 울림이, 이제는 정서적 치유와 심리적 안정, 마음챙김의 도구로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와 불안, 소음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사찰에서 울리는 범종의 소리는 잠시 멈춤과 사색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울림은 단순히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껴지는’ 소리다. 종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현재에 집중하게 되고,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소음과 분주함이 차단된다. 이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지금 여기에 머무는 수행'의 실현이기도 하다. 범종의 의미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자비를 전하고, 혼란을 가라앉히며, 내면의 평화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종각이라는 공간 자체는 한국 건축미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목재와 곡선의 조화, 단청의 상징, 구조적 안정성은 오늘날에도 건축학적, 예술적 연구 대상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사찰의 범종을 단지 종교적 유물로서가 아니라, 정신문화와 예술,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유산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소리를 통해 우리는 삶의 본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으며, 분주한 일상 속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중심을 찾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사찰의 종소리는 여전히 말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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