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탑은 통일신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형식과 장식을 발달시켰다. 석탑은 불교 신앙의 상징이자 사찰의 중심 조형물로서, 고려의 불교적 세계관과 기술 수준을 반영한 구조물이다. 이 글에서는 고려 초기부터 후기까지 탑 양식의 변천과 그 특징을 살펴보고, 각 시기별 대표 석탑을 통해 조형성과 상징성의 발전 과정을 분석한다. 고려 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시대정신이 응축된 건축 조형의 정수였다.
고려 불교와 석탑, 정교한 신앙의 형상화
고려시대는 불교가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중심 사상으로 작용한 시대였다. 국가 권력은 불교를 통해 이상적 질서를 세우고자 했고, 사찰과 불교 미술은 그 실현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특히 탑은 불교적 신앙의 중심 매체이자 사찰 건축의 중축(重軸) 역할을 하였으며, 시기별 양식 변화는 고려 불교의 변화와 기술적 성숙 과정을 함께 보여준다.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 전통을 이어받은 고려 전기에는 주로 간결하고 단아한 이중 기단 석탑이 중심을 이뤘다. 이 시기의 탑은 구조의 간결함, 장식의 절제, 안정된 비례를 특징으로 한다. 대표적으로 개성의 개경탑, 평양의 장천 1 호분탑이 이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는 신라의 조형성과 송나라의 영향을 융합한 초기 특징이다. 중기 이후에는 점차 장식성이 강화되고, 불상과 부조 조각이 부착된 부조형 석탑, 다층 다각형 석탑, 원형 탑신을 가진 이형 탑 등이 나타난다. 특히 지방 사찰에서 다양한 실험적 형식이 등장하며, 고려의 지역적 예술 다양성도 함께 표출된다. 후기에는 사리탑, 승탑 등 의례용 탑이 증가하면서 기능적 차별화가 뚜렷해졌다. 고려 탑의 발전사는 단순한 조형 변화를 넘어서, 당시 불교 사상과 사회 구조, 장인 정신과 기술 변천까지 아우르는 건축 문화사의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시기별 양식의 특징과 대표 유산을 중심으로 고려 석탑의 발전 흐름을 체계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고려 석탑의 형식과 조형미, 시대별 변천
고려 전기(10~11세기)의 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대부분 계승하였다. 이 시기의 탑은 **이중 기단**, **삼층 탑신**, **정형화된 옥개석**을 갖춘 ‘삼층석탑형’이 주를 이루었다. 전체 구조는 단순하지만, 기단의 비례, 층간 옥개석의 곡선 처리에서 섬세함을 볼 수 있다. 대표적 예로는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초기 구조가 있으며, 이는 후대 화려한 장식적 경향으로 넘어가기 전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고려 중기(12세기)에는 불교의 민간 확산과 함께 다양한 탑 형식이 출현한다. 특히 승탑과 사리탑 등 의례용 소형 탑이 증가하였고, 조형 면에서도 실험성이 강해졌다. 예를 들어, 평면 팔각형 구조를 가진 장흥 보림사 사리탑, 다층형 부조 탑신을 지닌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등은 복합 조형미를 보여준다. 탑신에는 보살상, 사천왕상 등 조각이 새겨졌고, 이는 ‘탑 자체가 하나의 불교 세계’라는 인식을 반영한 결과였다. 고려 후기(13~14세기)로 오면서 조형은 점차 장중함보다 장식성과 복합성을 지향한다. 특히 경천사지 십 층 석탑은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 탑은 높이 13.5m에 이르며, 전체 10층 구조 속에 화려한 부조 장식과 비례미가 조화를 이룬다. 옥개석의 단차, 연화문 기단, 상륜부의 장식은 모두 고려 후기 불교미술의 절정이라 평가받는다. 경천사지 탑은 원나라 양식을 도입한 흔적이 뚜렷하며, 국제적 예술 교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등은 이형 탑신 구조와 상징적 장식으로 고려 후기 석탑의 형식 실험을 잘 보여준다. 일부는 석재 대신 벽돌, 청자타일을 사용하기도 하며, 이는 사찰 장엄 방식의 변화와도 연계되어 있다. 정리하자면, 고려시대 석탑은 초기의 단정함에서 중기의 다양성, 후기에 이르러 장식과 기술이 집약된 양식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불교사상, 사회문화, 조형기술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건축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고려 석탑의 건축사적 의의와 동아시아 건축미의 정수
고려시대 석탑은 단순한 불교 의식 구조물이 아니라, **조형과 신앙, 권력과 예술이 융합된 건축적 총체물**이다.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만의 사회적 배경과 예술적 감각을 담아내며 새로운 형식과 장식을 창조하였다. 이는 석탑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사상과 기술, 장인의 감각을 가장 집약적으로 담아낸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 석탑은 동시대 송, 원, 요 등의 국가와 비교해도 그 예술성과 기술력이 뒤지지 않는다. 특히 후기로 갈수록 나타나는 장식성과 불화적 요소는 건축과 조각,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종합예술로서 평가받는다. 이는 오늘날에도 문화재 복원, 건축 디자인, 미술사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영감을 제공한다. 현존하는 고려 석탑은 수적으론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탑 하나하나가 완결된 조형의 세계를 품고 있다. 우리는 이를 단순한 과거 유산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창조력과 신앙의 표현으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고려시대 석탑은 건축사, 미술사, 불교사 모두에서 독립된 연구 가치를 지닌 주제이며, 과거의 조형이 어떻게 한 시대의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지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 비례와 형식, 상징은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 쉬며, 현대 건축과 조형미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